작가의 생몰은 1488~1543년 임. 조선 중기의 문신(文臣) 임. 조광조와 함께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후 정언·전랑·수찬·교리 등의 직(職)을 역임하고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김정 등을 위해 항소하다 삭직(削職)되어 고향인 능주로 돌아와 증조산 아래 학포당(學圃堂)을 지어 공부로 소일함. 능주로 유배되어온 조광조는 매일 경론을 탐구하며 지냄. 이후 다시 벼슬을 제수받으나 사양하고 학문연마와 소학 근사록 등을 지침삼아 처신을 올바르게 하고 신진사류의 한 사람으로 활약함. 한편으로는 회화에도 일가견 있어 안견(安堅)의 한국화(韓國畵)풍을 계승함. 그의 한국화(韓國畵) 1점이 전해지며 병풍 또한 본 박물관에 있는 것이 유일한 것으로 사료됨.